프리인퓨전: 커피와 물의 첫 만남
프리인퓨전은 추출의 첫 관문이다. 물을 낮은 압력(보통 1~3 bar)으로 커피 가루에 천천히 적셔주는 과정인데, 이 단계에서 맛이 이미 절반 이상 결정된다. 쉽게 말해, 커피 가루에 물을 "깊게 스며들게 하는 준비"다. 일반적인 프리인퓨전 시간은 3~8초 정도다. 이 시간 동안 커피가 골고루 적셔지면 추출 과정에서 채널링이 줄고, 맛의 균형이 좋아진다. 예를 들어, 라이트 로스팅 원두나 고운 분쇄도는 프리인퓨전이 없으면 물이 한쪽으로 쏠리기 쉬운데, 이로 인해 산미만 과도하게 나오거나, 단맛이 약해질 수 있다.
고급 머신에서는 프리인퓨전 압력과 시간을 조절할 수 있어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다. 수동 머신을 쓰는 바리스타라면 레버 감각을 통해 직접 컨트롤할 수도 있다. 프리인퓨전은 단순한 예열이 아니다. 커피와 물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라고 보면 된다. 바리스타라면 반드시 이 감각을 몸에 익혀야 한다. 제대로 된 프리인퓨전은 추출의 질을 완전히 바꾼다.
다르시의 법칙: 물이 커피를 통과하는 길
다르시의 법칙(Darcy’s Law)은 본래 유체역학 법칙이다. 쉽게 말해 "물이 얼마나 잘 통과하느냐"를 계산하는 방식이다. 커피 추출에서는 이게 아주 중요하다. 커피 베드(포터필터에 담긴 커피)는 작은 입자들로 이뤄진 다공성 구조다. 물은 그 사이를 통과하면서 커피 성분을 가져온다. 이때 물의 흐름이 일정해야 맛도 일정해진다.
예를 들어, 분쇄도가 너무 곱거나 탬핑을 너무 세게 하면 물은 통과하기 힘들고 과추출된다. 반대로 분쇄가 너무 거칠거나 탬핑이 약하면 물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미추출된다. 다르시의 법칙은 ‘물은 저항이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원리를 말하는데, 이게 바로 채널링의 원인이다. 바리스타가 이 원리를 이해하면, 추출 흐름을 조절하는 능력이 생긴다. 탬핑을 얼마나 세게 할지, 도징 양은 얼마가 적당한지, 브루잉 도중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논리적으로 진단할 수 있다.
결국, 추출의 흐름은 물이 만든다. 하지만 그 흐름을 설계하는 건 바리스타다.
왜 9bar로 추출할까?
많은 커피 머신은 기본 추출 압력을 9 bar로 설정하고 있다. 왜 하필 9 bar 일까? 이건 수많은 테스트와 경험을 통해 결정된 '맛의 중심점'이다. 9 bar는 에스프레소용으로 고르게 분쇄된 커피를 25~30초 내에 균형 있게 추출하기에 가장 적합한 압력이다.
압력이 너무 높으면 과추출되어 쓴맛과 텁텁함이 강해지고, 너무 낮으면 산미 위주로 얕은 맛만 남는다. 9 bar는 그 중간, 단맛·산미·바디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이다. 물론 머신에 따라 8 bar, 9.5 bar, 10 bar 등으로 조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이 되는 기준점은 9 bar다. 이는 ‘정답’이 아니라 ‘기준’이다. 이 기준에서 벗어났을 때 어떤 맛의 변화가 있는지를 이해하면, 더 유연한 추출이 가능해진다.
바리스타는 머신의 세팅값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수치를 ‘맛의 방향타’로 활용해야 한다.
물퍽이 생기는 이유, 그리고 해결법
물퍽이란 추출 후 포터필터 바스켓에 물이 고여 있고 커피가 질척거리며 뭉쳐 있는 상태를 말한다. 보기에도 좋지 않고, 청소도 불편하며, 추출 불균형의 신호일 수 있다. 물퍽의 주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 도징량이 너무 적다 - 탬핑 압력이 약하다 - 바스켓 용량에 비해 커피가 부족하다 - 머신의 압력이 낮거나 프리인퓨전이 너무 길다 - 원두가 수분을 많이 머금은 상태
물퍽이 계속 생긴다면 바스켓에 맞는 도징량을 정확히 맞추고, 탬핑은 수직으로 균일하게 해야 한다. 또한 머신의 추출 압력이 정상인지도 확인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텀리스 포터필터로 추출 흐름을 직접 관찰하는 것이다. 추출이 한쪽으로 쏠리거나, 흐름이 튀는 것이 보이면 그건 물퍽의 사전 경고다. 물먹은 단순한 ‘지저분함’이 아니라, 추출 밸런스가 무너졌다는 신호다.
디스트리뷰션 툴: 모든 추출은 정리에서 시작된다
디스트리뷰션 툴은 포터필터 위에 도징된 커피를 평평하게 정리해 주는 도구다. 수평을 맞추고, 밀도 차이를 줄여줘서 탬핑이 안정적으로 들어가게 도와준다. 디스트리뷰션이 잘 되면 채널링이 줄고, 추출 흐름이 고르게 유지된다. 컵의 맛도 일관되게 유지된다. 대표적인 도구는 다음과 같다:
- **OCD 툴**: 회전식 디스크 형태로 표면을 균일하게 만듦 - **WDT 툴**: 얇은 바늘로 커피 가루를 풀어 엉김을 없앰 - **수평 디스크형 툴**: 바스켓 전체를 밀어주며 밀도 정리
디스트리뷰션은 특히 초보 바리스타에게 유용하다. 감각이 부족한 초반엔 툴이 기준을 만들어주고, 추출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툴이 만능은 아니다. 너무 많이 돌리면 오히려 커피가 과하게 눌리거나, 베드가 단단해져 물 흐름이 막힐 수 있다. 적절한 깊이와 회전 횟수를 찾는 감각은 결국 경험이 만들어준다. 모든 추출의 출발은 ‘균일한 준비’에서 시작된다는 걸 기억하자.
마무리: 정석은 기준일 뿐, 정답은 맛이다
에스프레소 추출에는 수많은 정석과 기준이 존재한다. 프리인퓨전, 다르시의 법칙, 9 bar의 압력, 물퍽의 원인, 디스트리뷰션까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바리스타가 궁극적으로 집중해야 할 건 오직 하나다. **‘내가 원하는 맛을 일관성 있게 내는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정석은 맛을 내기 위한 ‘도구’이지, 절대적인 답은 아니다. 만약 다른 방식으로 추출했는데 그 원두의 개성이 더 잘 드러난다면, 그게 바로 그 원두의 정석일 수도 있다. 추출은 논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논리의 끝에는 항상 감각과 창의성이 있다.
**정답은 언제나 컵 안에 있다.** 그 한 잔의 커피가 모든 걸 말해준다.